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마다, 나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조금만 더 생각해볼게"
그 말은 선택을 거부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선택을 미루는 방식에 가깝다.
그 순간에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지금 당장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묘한 감정이 남는다.
결정을 하지 않았는데도, 마음 한편이 계속 불편하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정리되지 않을까.
그때 깨닫게 된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결정을 미루는 선택은 책임을 뒤로 보내는 방식이다.
선택을 하지 않는 순간은 잠시 편안하다.
결정의 결과를 떠올리지 않아도 되고, 잘못 고를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선택을 미루는 쪽을 택한다.
하지만 이 미룸은 선택의 부재가 아니다.
그보다는 결정을 나중으로 넘기겠다는 선택에 가깝다.
책임을 없앤 것이 아니라, 시간을 뒤로 미룬 것이다.
문제는 그 책임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정을 미룬 상태에서는, 언제 다시 선택해야 할지가 마음속에 남는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일처럼 계속해서 의식을 붙잡는다. 그래서 선택을 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은 쉬지 못한다.
결정을 미루는 선택은 즉각적인 부담을 줄여주지만, 그 대신 지속적인 긴장 상태를 만든다.
이 긴장은 눈에 띄지 않게, 천천히 마음을 소모시킨다.
선택하지 않음은 상황을 그대로 흘러가게 만든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면, 상황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이 흐름은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환경이나 타인의 선택에 맡기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어떤 제안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면,
그 제안은 거절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기회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
선택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발생한다.
이때 흥미로운 점은 결과에 대한 감정이다.
직접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결과에 대해 애매한 감정을 느낀다.
완전히 책임지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전혀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기도 어렵다.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과에 대한 주도권을 내려놓는 선택이기도 하다.
그래서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후회는 더 복잡해진다.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라는 생각과 "그래도 내가 결정했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동시에 남기 때문이다.
선택하지 않는 상태는 마음을 계속 '열어 둔다'
선택이 내려지면, 마음은 어느 정도 닫힌다.
결과를 받아들이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마음이 계속 열려 있다.
이 열린 상태는 처음에는 가능성처럼 느껴진다.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가능성은 정리되지 않은 부담으로 변한다.
선택하지 않은 일들은 마음속에서 계속 자리를 차지한다.
"언젠가 해야 할 일", "아직 결론 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상태가 길어질수록, 마음은 늘 진행 중인 상태에 머문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결정도 하지 않았는데도 피곤해진다.
선택하지 않은 선택들이, 마음을 계속 깨어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론: 선택하지 않는 것도 분명한 선택이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중립적인 상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분명한 선택이다.
책임을 미루는 선택, 흐름에 맡기는 선택, 마음을 열린 상태로 유지하는 선택이다.
이 선택은 당장의 부담을 줄여주지만, 대신 장기적인 피로를 남길 수 있다.
왜냐하면 선택하지 않은 일들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속에서 계속 대기 상태로 남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면, 선택하지 못한 자신을 덜 탓하게 된다.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이 게으름이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선택이 너무 많은 환경 속에 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선택 앞에서 느끼는 피로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인식은, 마음을 아주 조금 덜 무겁게 만든다.